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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마지막 잎새

거실 창으로 보이는 감나무는 무성하던 잎을 모두 떨구고 이제 달랑 세 개가 남았다. 벽을 배경으로 바람에 떨고 있는 마른 잎을 보고 있노라면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가 연상된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겪는 일이다. 아침을 먹으며 아내에게 말해주니, 그녀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는 입구 양옆으로 밭이 있다. 철 따라 토마토, 호박, 옥수수 등을 심고 거둔다. 주일 아침 성당 가는 길에 보니 앰뷸런스와 소방차가 와 있고, 밭에서는 구급대원들이 심폐소생술 하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 일을 하다 쓰러진 모양이다.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응급처치를 하는 것을 보니 상황이 꽤 다급해 보인다. 멀리서 보고 지나가는데 아내가 성호경을 긋는다.   미사를 하며 얼굴도 모르는 그 농부를 생각했다. 부디 살아나기를 기원했다. 1시간 남짓 미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보니 앰뷸런스가 있던 자리에는 경찰차가 와 있고, 밭 한가운데는 흰 천이 놓여있다. 주변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결국 그는 소생하지 못한 모양이다.   “문 밖이 저승이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의 죽음을 지나치며 나를 괴롭히는 욕심과 걱정이 얼마나 하찮은 일들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그 아침이 망자의 마지막 날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그에게 건성으로 데면데면한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가. 어쩌면 그는 일찍 일을 끝내고 가족과 크리스마스 쇼핑을 가거나 외식을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젊은 아빠가 아니기를 바란다. 젊은 아내, 어린 자식을 두고 어찌 마음 편히 눈을 감았겠는가.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하는 길이지만 다들 남의 일인 양 모른 척하며 산다. 물론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 죽음만 생각하며 어찌 눈앞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겠나. 하지만 가끔은 우리 마음의 욕망과 질투와 근심 걱정을 죽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죽음 앞에서는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다음 번 겨울비는 감나무의 마지막 잎새들을 떨굴 것이다. 그리고 봄이 되면 그 자리에는 새로운 잎이 나겠지. 달력이 바뀌고 나면 내게는 외손녀가 한 명 늘어나고 봄이 되면 백일떡을 먹게 될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나는 새로 맞는 손녀의 돌도 보고 초등학교 입학도 볼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확률일 뿐,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손녀를 만나는 일도, 아이가 걸음마를 익히고 내 뺨에 뽀뽀를 하는 일도 다 내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조금은 겸손해진다. 내가 잘나 이룬 것은 별로 없고 어쩌다 보니 내게 주어진 것들이라는 생각이다.   그날 나는 타운에서 딸아이의 시부모님과 저녁을 먹었다. 코로나 탓에 곧 두 살이 되는 손녀의 베이비 샤워 때 보고 2년 만에 만났다. 이런 인연들이 모두 고맙게 생각된다. 이름 모르는 농부의 명복을 빈다. 고동운 / 전 주공무원열린 광장 잎새 마지막 잎새들 이의 죽음 근심 걱정

2021-12-14

[이 아침에]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큰 걱정이 작은 근심을 덮는다. 큰 일이 터지면 작은 근심은 사라진다.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죽고 사는 일에는 밀린다. 근심의 근원은 소유와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다. 욕망은 끝이 없다. 먼지처럼 몸에 달라붙은 욕망의 찌꺼기들은 세월이 갈수록 두터운 겨울 코트처럼 무거워진다. 내려 놓으려 해도 근심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걱정, 근심도 순서가 있다. 죽고 사는 일이 생기면 작은 염려가 헛수고다. 선배 한 분이 생을 마감했다. 모진 병으로 허망하게 떠났다. 불치의 병을 선고 받고 고통으로 투병하며 사는 게 얼마나 무서웠을까. 자상하고 이웃 섬기고 하나님 믿고 의지하며 무엇보다 건강을 살뜰하게 챙기던 분이다. 어머니 담근 김치 맛있다며 몸에 안 좋은 흰밥 대신 물 마시며 먹고 삶은 계란도 흰자만 드셨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을 묵상하면서도 지난 일들은 괴로워하고 마주할 오늘을 근심하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내일을 미리 염려한다. 내 근심과 걱정은 과거집착형이고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지속형이다. 하루도 걱정 근심 내려 놓고 산 적이 없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의 시 ‘절망’ 중에서.   구원과 평강을 꿈꾸지만 후회도 반성도 없이 근심 걱정에 매달려 허덕이며 산다. 새벽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이승인지 저승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환상처럼 스쳐가는, 의식과 무의식이 엇갈리는, 몇 초의 희미한 이미지가 나의 하루를 지배한다. 환상과 기쁨도 있지만 걱정과 근심 거리가 대부분이다.       안반낙도(安貧樂道)로 근심 걱정 없이 사는 무수옹(無愁翁)의 길은 요원하다. 탐심을 버리면 피곤한 삶이 덜 고단해진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버리면 사는 게 가벼워진다. 버티려고 발버둥칠수록 삶의 실타래는 더 꼬인다. 무수옹으로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유와 집착의 욕망에서 해방 되는 길이다.     욕망의 눈을 감으며 고단함이 덜어진다. 잘 늙는다는 것은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 준 복과 고통을 인간이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품위 있게 산다는 것은 한탄과 넋두리, 근심 걱정 대신 처지와 분수를 아는 일이다. 불가에서는 탐심, 진심, 치심의 삼독심(三毒心)을 경계한다.       세상의 모든 것, 좋아하는 것을 다 가지려는 것은 탐심이다. 진심(嗔心)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생기는 원망과 불만, 노여움을 말한다. 치심(癡心)은 어리석음이다. 착각에서 나오는 자만과 오만 나태함이 묻어난 의심이다. 삼독심은 분별의 눈을 멀게 하고 물욕과 애착으로 마음을 병들게 해 걱정 근심의 늪에 빠지게 한다. 천복(天福)을 내리는 것은 하늘이지만 받는 자는 인간이다.   이기희 / Q7 파인아트 대표·작가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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